버려진 직물 공장이 핫플로 태어나다, 조양방직

 

버려진 직물 공장이 핫플로 태어나다, 조양방직

조양방직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방직공장이다. 현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가 된 카페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1937) 시절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유서 깊은 곳이다. 해방 이후까지만 해도 강화도는 국내 3대 직물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직물공장만 60여 곳이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합성섬유와 인조 직물이 인기를 끌면서 대다수의 공장들이 가동을 멈췄다. 그렇게 수십 년간 폐공장으로 방치되어 있던 조양방직은 몇 년 전 보수공사를 거쳐 이색 카페로 탈바꿈했다.



시멘트 건물 외관을 그대로 살린 카페 외관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내부 역시 과거에 사용하던 테이블을 작업대를 꾸며 그대로 옮겨 두었다.

 

 

이제는 사용이 불가능한 재봉틀이나 의자 등은 조양방직만이 갖는 독특함을 전한다. 벽에 걸린 다양한 그림과 1954년 조양방직의 조업 모습을 찍은 사진은 오래된 자전거와 고장 난 트랙터, 칠이 벗겨진 빨간 전화박스 등과 어울려 빈티지한 분위기를 더한다.

 

 

조양방직은 1937년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시작하였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설립 이후 착공에 이르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장 가동 후 1년여가 되는 1939년에 큰 화재가 나서 소실되고 말았고 피해액은 40만원(200억 원 내외)에 달했다고 한다.​

 


설립 초기에 사장은 형인 홍재묵이 맡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동생 홍재용이 부사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하지만 1942년 미쓰비시 산업에서 일하던 이세현에게 공장을 매각하였으며, 이세현은 아들 이현일과 함께 조양방직을 운영하다가 한국 전쟁을 거쳐 1958년에 폐업한다. 이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2013년 문화방송 주말 드라마 "백년의 유산"의 촬영지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졌고, 2010년대 중반에 들어어서 미술관 카페가 들어서게 된다. 2020년대인 지금은 많은 인파가 찾아온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의 주택단지에 위치한 ‘강화 조양방직’은 총 2500여 평의 대규모 폐공장이 몇 해 전 새 주인을 만나 개조된 공간이다. 강화에 오면 꼭 들려야할 관광명소이자 이색적인 카페로 유명하다. 버려졌던 공간이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조양방직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공장의 형태를 그대로 남겨둔 건물들과 문밖에 세워진 빈티지한 간판의 모습이다. 뾰족한 삼각형의 공장 지붕과 한옥의 구조는 과거 일제강점기의 건물임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입구 앞을 살피면 찾아와주시는 손님들의 힐링을 위한 공간임을 표명하고 있는 알림과 더불어 창고를 지나 오른편 건물 입구로 향하게끔 안내사항이 붙어있다. 안내를 따라 오래된 공장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창고 건물을 지나면 넓게 트인 공장 앞마당과 그 바깥에 서있는 오래된 옛 버스, 때 묻은 마네킹 등이 이곳을 찾아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강화 조양방직은 대부분의 인테리어가 철재와 앤티크 소품을 이용하여 전시되어 있다. 공장터 안에 자리 잡은 낡은 자전거와 오래된 동상들, 고장 난 트랙터, 문 닫은 유원지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회전목마, 칠이 벗겨진 빨간 전화박스 등 통일성이 없는 다양한 옛 물건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본래 서울 인사동에서 상신상회라는 유럽 빈티지 샵을 운영하고 있던 이용철 대표는 강화에서 사진작가로 활동을 하던 지인이 보여준 사진을 통해 조양방직을 알았다. 처음 그 낡은 폐가의 사진을 보았을 때는 그 또한 난색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조양방직의 모습은 쓰레기가 한가득 쌓여있었고, 등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 넓은 폐가를 새로운 공간으로 가꾸는 일은 쉽지가 않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자꾸만 자신의 머릿속을 맴도는 조양방직의 모습에 이 대표는 아내와의 상의 끝에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건축물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공사부터 쓰레기를 치우는 것만 몇 달이 걸렸다.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무거운 짐처럼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공장을 리모델링하는 데만 1년여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조양방직을 가꾸어 나가며 하나둘씩 변해가는 그 모습을 보며 기쁨도 느꼈지만 마음고생도 무척 많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