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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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 영릉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사적 제19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이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재세 : 1397년 음력 4월 10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 재위 : 1418년 음력 8월 11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준수방 본궁에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큰형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즉위 후 이듬해 집현전을 설치하여 많은 학자들을 등용하였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보고오라 명하였다. 이에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아뢰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폈으나, 신숙주는 세종이 온 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 세종은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 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의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서야 전날 밤 왕이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혼천의(渾天儀)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을 확장하였다. 또 여러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고, 국가의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에는 우리나라 고유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창제하는 등 정치·경제·문화·과학·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 영응대군 사저인 동별궁에서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영릉의 지세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라 한다. 거기에다 정남향 이어서 ‘가히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인데, 이를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한다.


영릉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기념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성역화사업으로 주변정비를 실시하였다. 훈민문을 지나 너른 능역을 조금 걸으면 연못과 홍살문, 정자각이 차례로 다가선다. 언덕에 올라서면 석상, 석마, 문인석, 무인석을 앞에 둔 합장릉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조선 왕조 500년사의 가장 뛰어난 임금인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다. 당초에는 광주 대모산에 있던 것을 예종(1469년)때 이곳으로 천장되었다. 이능을 천장후 조선조가 100년 연장되었다는 가백년설이 전해지고 있다.

 

소헌왕후 심씨(재세 : 1395년 음력 9월 28일 ~ 1446년 음력 3월 24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천부원군 심온과 삼한국대부인 안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 당시 충녕군이었던 세종과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고, 1417년(태종 17) 삼한국대부인이 되었다가 1년 뒤에 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경빈)에 되었다. 같은 해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공비(恭妃)가 되었고, 1432년(세종 14)에 왕비가 되었다.

 

소헌왕후는 세종 즉위 초 태종의 외척세력 견제로 인해 친정이 화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 심온과 작은아버지 심정이 죽었다. 이때 소헌왕후 본인도 폐위될 뻔하였으나 세종의 보호로 무사하였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문종·세조·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대군) 2녀(정소·정의공주)를 낳았으며, 1446년(세종 28)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의 사저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 『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이를 받아본 세종은 직접 『석보상절』의 내용을 한글 노랫말로 옮겨 악장체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렸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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