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남태령 대첩
남태령?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과천시는 서울시, 안양시, 성남시와 인접한 교통의 요충지로 전형적인 서울의 위성도시다. 조선시대 과천은 충남, 호남 지역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관문 중 하나였다. 남태령은 한양으로 입성하는 주요 요충지로 정조대왕이 선친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정조대왕 행차길의 흔적이 남은 곳이 또 있다. 조선시대 과천현의 객사로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는 뜻의 온온사가 그곳이다.
한양에서 삼남으로 가는 유일한 도보길, 남태령 옛길. 남태령이란 이름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18세기 말 정조임금이 수원에 있는 선친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 현 이방 변씨가 엉겁결에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자가 본래 고개 이름이 여우고개인데 어찌 거짓을 고하냐며 질책하자 변씨는 여우고개라는 이름이 요망스럽고 상스러워 감히 그대로 고할 수 없어 남태령이라 했다고 한데서 비롯됐다. 남태령은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정조가 매우 흡족해 했다고 전해진다.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관문이었던 남태령에는 이들 선비의 봇짐을 노리는 도적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 도적들의 행위가 여우같다고 해서 남태령을 여우고개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은 많은 지역에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에서 이름 붙여졌다. 그 중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남태령이었다.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골짜기에 여우가 많이 출몰했기 때문이다.
과천시에서는 남태령에 얽힌 사연과 이야기로 이 길을 옛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나무계단이 설치된 이 흙길을 걷고 있노라면 정계 진출의 포부를 안고 괴나리봇짐을 단단히 그러쥐었을 선비들의 늠름한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남태령에는 과천루라는 이름이 붙은 망루가 하나 있다. 이 망루에서 바라보는 과천의 전경이 무척 아름다워 과천 8경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는데, 망루까지 올라보면 어느 새 과거를 앞둔 선비가 된 듯 마음이 호젓해진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통하는 삼남대로 주요 도보길이었다. 이때는 지금과 달리 남태령 전체가 과천현 관할이었고, 읍치가 있는 과천현 중부와 과천현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로였다.
옛부터 한양에서 삼남 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일제강점기에 현 47번 국도와 39번 국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강대교~남태령~군포~남양간 신작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8년 영등포-수원간 1번 국도가 먼저 포장되고 1968년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 개통, 1973년 경수대로 왕복 4차로 확장 개통으로 이어지면서 도로 확충이 늦었던 남태령은 한때 쇠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폭주하는 서울-수원간의 교통량 분산과 안양시 개발의 촉진을 위해 1976년 남태령~호계사거리간 395번 지방도가 왕복 4차로로 개통되면서 다시 남태령은 수도권의 중추 간선도로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이 395번 지방도는 5년 뒤 1981년에 47번 국도로 승격하였으며, 47번 국도 연선에 위치한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안산시 등의 급격한 성장에 힘입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남태령은 이미 교통량 포화로 극심한 정체를 겪게 되었다.
옛날 이름은 여우고개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우고개로 통하기도 한다. 남태령이라는 이름은 조선 왕조 때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참배하러 궁 밖으로 나갔을 때 관료들에게 이 고개이름이 뭐냐고 묻자 당시 과천현 이방이었던 변 씨가 남쪽의 큰 고갯길이라는 뜻으로 남태령이라고 붙여주었다는 데서 기인한다. 원래의 고개 이름을 알고 있던 신하가 왜 전하께 거짓말을 하느냐고 꾸짖자 변씨 曰, "감히 주상 전하께 여우고개 같은 요망한 말을 올릴 수 없어서"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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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남태령 대첩
전날 21일부터 남태령에서 시민-농민 시위대와 대치 중이던 경찰이 22일 새벽 1시 30분경 버스벽을 남태령에서 사당IC로 후퇴 시켰다. 2시경 민주노총 역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새벽 3시 경 경찰이 선바위역 방면에서 남태령역 방면으로 들어가는 중앙로 차로를 봉쇄했다. 03시 30분경 더불어민주당 모경종 의원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12시 30분경 강선우 의원도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의 버스차벽과 사당IC 점거의 여파로 해당 지역에 차고지가 위치한 4212번, 4318번, 4319번 3개 노선 버스가 첫 차부터 10시대까지 전 차량 운행이 일시 중단되었으며(운행 재개), 이후에도 이수역 이북 구간부터 운행 중에 있다. 배차가 꼬여 20여 대가 일시에 나오면서 이 날 하루종일 정상 배차가 어려울 전망이다.
그 외에도 남태령고개를 경유하여 사당역이 종점인 수많은 광역버스가 선바위역 우회 또는 관문사거리에서 승객 하차 후 회차 등 대체경로로 파행 운행 중이다.
경찰과 대치 중 조합원 2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참가자 1명이 실신하는 등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더불어민주당 김성회, 임호선, 이소영, 채현일, 문금주 의원이 경찰청에서 이호영 경찰청장 직무대행을 만나 봉쇄 해제를 타결 시켰다. 경찰이 차벽을 여는 즉시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 앞 한강진역까지 행진을 재개할 예정이다.
16시 14분경부터 차벽이 열리기 시작했고 약 28시간 만에 경찰이 철수함으로써 16시 40분경 트랙터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관저까지 행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교통경찰 안내 하에 트랙터 30여 대 중 10대만 동작대교를 넘어 이태원과 한강진역 집회 장소를 지나서 한남대교로 넘어가는 경로로 행진하며, 시민들은 차벽을 연 이후 사당역까지만 트랙터와 함께 행진하고 다음 집회 장소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으로는 지하철과 버스 등을 통해 개별 이동하였다.
트랙터를 이끌고 상경했다가 경찰벽에 막힌 농민들이 함께 해준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농민만 있을 땐 강압적이었으나 시민들이 참여함으로 인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오후 6시에 열린 한강진역 집회에 주최 측 추산 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오후 6시 40분경 28시간의 대치를 뚫고 남태령을 넘은 트랙터 13대가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자 “국민이 이겼다! 농민이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라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트랙터들을 몰고 온 '전봉준 투쟁단'이 전국 농민들의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을 전달하고 이날 오후 7시가 넘어 해산하면서,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최종 목적지로 한 농민들과 시민들의 연대시위는 시작부터 끝까지 평화시위로 마무리되었다.
내란수괴 부하들 직무 정지인데 누가 막았나?
내란 수괴 및 그 부하들 직무 정지 / 구속 중인데 누가 막은 것인가??
이것도 경호처? 사전에 이럴걸 생각해서 22년 11월에 군경 지휘감독권을 경호처로 이관한 것인가??
도대체 내란수괴의 계엄은 언제부터 시작된것인가
청와대에서 국방부로 이사 할때부터 시작이었던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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